들릴 때까지

대화
Archival pigment print, 2025

시간을 두는 사람들
Archival pigment print, 2025

흔적
Archival pigment print, 2025

엉켜짐
Archival pigment print, 42x27.7cm, 2025
“울렁이고 단단한 것” 또는 인간과 세계의 구조와 방향에 대하여
강예솔, 최예빈 두 작가의 이번 전시는 분리된 전시 공간에서 진행되는 각각의 개인전이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된 주제를 가지고 함께 기획한 “2인 연립전” 의 형식의 전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작가들은 그들의 공동 주제를 “울렁이고 단단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울렁이다”라는 말은 유동적인 어떤 것, 예를 들면 물결이라든가 심장이나 위장처럼 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신체 내부나 인간의 마음처럼 보이지 않지만 물의 흐름과 유사한 흐름이나 울림과 같 은 움직임이 있는 대상에 자주 사용해 왔던 표현인데 작가는 “울렁이다”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어떤 감각적인 측면을 자신들의 전시 주제에 차용하고자 했 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표현에 연이어 사용한 “단단한 것”이라는 표현 역시 앞서 사용한 “울렁이다”와 대조되는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대구적 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작가들은 왜 울렁이는 것에 대해, 그리고 단단한 것에 대해 주목하였고 그들이 생각하는 울렁이는 것, 그리고 단단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그들이 감각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작업은 각각 자신들의 감각에 대한 다양한 상 황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예솔 작가의 이번 전시의 개인 주제는 ”들릴 때까지”이다. 작가의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인간 혹은 인간 사 회에 대한 것이며, 작가의 작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작용 혹은 인간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여러 이미지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런데 이러한 작업에 대해 작가가 “들릴 때까지”라는 명제를 전시에 앞서 내세우게 된 것은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극, 즉 인간 사회 속 여 백의 공간이 명료하게 다가왔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작가에게 인간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개별적 존재로 파편화되고 흩어져 버린 상황이 더 부각되어 보였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그의 작업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결 국 그 간극을 잇는 연결고리를 작가는 ‘소리’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물리적, 정신적 차원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구 분되고 단절되어 있는 상태일 수 밖에 없는 개별적 존재의 상태에서 어떻게 인간은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 서 작가는 ‘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공명할 수 있고 동기화 될 수 있다면 개별적 존재들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던 것 같다. “들릴 때까 지”라는 말 안에는 들을 수 있다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현실 사회에서 그 소리라는 매개 체도 전달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에 “들릴 때까지”라는 표현처럼 들릴 수 있음과 없음이 겹쳐 있는 듯한 양가적 표현을 사용하게 되 었는지 모른다. 작가는 아마도 그러한 현실적 상황을 삶 속에서 목도하고 경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소리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삶의 의미가 되는 소리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기에 그것이 전달되는 한계점을 인식하게 될 때마다 다시 그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 고 이 소리를 최대한 증폭시키고 확장하는 일, 그리고 지속시키는 일을 작업 가운데 구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작가가 소리 혹은 감각의 기표가 되 는 여러 이미지들을 작업에 가져오게 된 것은 이것이 소리이고 작가의 발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며 이는 인간 사회에 있어 생명의 확장이자 의미의 확장을 이루는 작은 실천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 최예빈 작가는 눈 앞에 있는 것들과 거리 두기를 하여 대상화하는 가운데 세계를 바라보고자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개미나 인형,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은 작가가 고찰하게 된 대상들이다. 대상과의 거리 혹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 생겼을 때, 그리고 대상을 타자 혹은 객체로 인지하게 되었을 때 작가는 그 지점에서 실존적 주체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실존적 주체가 해야 하는 행위는 끊임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 기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갈림길’이라고 이름 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창조한 다”는 관점에서 항상 “‘본원적 선택”을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기게 된 것은 존재에 있어 ‘선 택한다는 것’, 인간에게 있어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만드는 철학적 화두로 읽을 필요가 있다. 최예빈 작가 역시 인간이라는 실존적 존재가 선택하는 행위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는 가운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일련의 작업을 해나감으로써 인간이라는 실 존적 존재를 스스로 되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작가가 제시한 “갈림길의 정원”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작가가 읽어내고자 했던 미지의 것 혹은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것, 즉 작가 자신을 대신한 거울과 같은 대상일 수 있을 것임을 추측을 해보도록 만드는 작 업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 혹은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를 인식하는 방법으로 세계를 작업 안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예솔 작가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고 작업해 왔다면 최예빈 작가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작업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공동 주제를 “울렁이고 단단한 것”이라고 정하게 된 것은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세계에 있어 구조와 방향의 문 제처럼 서로 다른 층위를 고찰하는 가운데 인간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늘 유동적이고 변화하기에 그 실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 자체가 인간을 말하고 있기에 인간은 변화 속에서도 서로 간의 연결고리를 통해 소통할 수 밖에 없 는 구조를 인식하게 된다. 그렇기에 강예솔 작가는 그 연결고리를 ‘소리’ 혹은 ‘언어’라고 보고 타자에게 “들릴 때까지”라는 말로 인간과 인간이 이 어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발언을 작업에 담아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인간의 구조적 한계를 소리로, 언어로부터 울림을 주고 변화를 줌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것이다. 반면 최예빈 작가는 인간 존재의 구조 자체를 대상화하여 바라보면서 그 심층으로부터 선택이라는 인 간의 행위가 갖는 의미에 주목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작은 차이를 드러낸 대상을 반복해서 보여주거나 대상과의 거리 혹은 간극을 다양하게 노출 시킴으로써 다양한 차이들에 부여된 선택의 의미를 묻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이 실존하는 공간 혹은 그 속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대면하도록 만든 것이다. 강예솔 작가가 관계 혹은 방향으로부터 인간을 탐구하고 그로부터 구조에까지 접근하고자 했다면 최예빈 작가는 인간의 구조 자체를 직면하도 록 만들고 방향을 선택하는 행위의 의미를 공유하고자 한 것이다. 세계라는 단단한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게 되지만 구조는 방향에 따라 울 렁이고 변화하게 될 수도 있음을 작가들은 통찰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공유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의 지점에서 강예슬 작가와 최예빈 작가는
“울렁이고 단단한 것”이라는 화두로 하여 인간을 다시 바라보도록 만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다시 인식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승훈 (미술비평)
작가노트
낯선 사람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눈빛과 목소리들.
오로지 엄마를 애타게 부르던 어린 아이의 칭얼거림과 눈부신 햇살.
바쁘게 지하철로 향하는 발길과 여유롭게 산책길을 걷는 느린 발걸음들이 공존하는 동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
우리는 추운 겨울에 하나의 목소리로 외칠 줄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불안하고 답답해서 평소에는 서로를 그토록 증오하고 아프게 했는지.
여전히 이 세상은 사랑과 증오가 밤과 낮처럼 늘 함께하고 있다.
하물며 사랑조차도 냉정함을 아우르고 있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이 아름답고도 징그러운 세상이 나는 좋으면서도,
또 다시 싫어지기도 한다.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함꼐 있고 싶은 이기적이고 어려운 생각들로 깊은 밤에 나를 가둔다.
세상에는 다양한 외침들이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외침을 하며 살아간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외침, 오늘을 또다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힘찬 외침,
각자만의 내적 고민들과 싸워내는 마음속의 고요한 외침 등.
언젠가 이 모든 외침과 소리들도 모두 사그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 다른 하루가 흘러가고,
새로운 세상이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다시 한 번 그 어딘가에 들릴 때까지, 또 닿을 때까지, 우리만의 목소리로 소리 내어본다.
그 소리가 작은 속삭임이든, 고요한 외침이든,
지구 반대편에 들릴 만한 아주 커다란 외침이든 상관없다.
또 다시 시작되는 하루만의 외침으로 오늘을 겨우 채워가며 살아낸다.
큰 건 큰 대로, 작으면 또 작은 대로, 복잡하고 단순한 것들도 모두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것들을,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제 입맛대로 바꾸려 하는 순간,
모든 문제들은 시작된다.
어두운 밤의 외침도 밝은 날의 외침도 모두 하나의 외침이다.
좋은 날이 오기를 기대라고 기다리며 믿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나 싶다.
작품
대화 — Archival pigment print, 2025
시간을 두는 사람들 — Archival pigment print, 2025
흔적 — Archival pigment print, 2025
엉켜짐 — Archival pigment print, 42x27.7cm, 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