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주의에 대한 낙서적 처방

엔트로피 2
한지위에 안료잉크, 73x146cm, 2026

작가 노트
낙서적 처방과 수행적 비움, 드로잉으로 그려낸 역설의 세계에 대하여
김진석 작가는 회화의 가장 원초적 형식인 드로잉 기법을 근간으로 하여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업을 해오고 있다. 흔히 드로잉을 원초적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드로잉(drawing)이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가를 ‘끌어내다”, “당기다’라는 의미에서 왔고 이는 내적인 것들을 끌어내는 신체적 행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페인팅(Painting)이 “색을 입히다”, “장식하다”라는 의미라는 의미에서 왔기에 조금은 인간 이성이 개입된 것으로 느껴지게 되고, 이는 이차적인 인간 행위에 가깝게 보인다면, 드로잉은 인간 이성보다는 신체 혹은 인간내면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드로잉은 인간의 내면과 신체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어 화지나 캔버스 위에 담아내고 채우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김진석 작가는 이와 같은 드로잉 작업을 무엇인가를 담아내거나 채워 넣는 행위로 보기 보다는 거꾸로 ‘비움(Emptiness)’이라는 말로 바꿔 지칭하고 있다. 그가 그려낸 작업들을 볼 때 수많은 드로잉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음에도 작가가 이를 ‘비움(Emptiness)’, 혹은 ‘비움의 궤적(The Trajectory of Emptiness)’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작가의 이와 같은 관점과 태도는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에 앞서 끝없는 질문들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노트를 보게 되면 왜 작가가 이와 같은 명제를 작업에 앞서 내세우게 되었는가에 대해 일정한 실마리를 찾아내게 된다. 작가는 수많은 선들과 형태를 반복시키고 있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작업 노트의 첫 문장을 “나는 빈 종이가 무서웠다”라는 자기 고백을 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이번 전시 주제와 연결하고 있는 부제가 “완벽주의에 대한 낙서적 처방”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림을 그리게 될 때 마다 깨끗한 흰 백지 앞에서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떠 올릴 수 밖에 없었던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어떤 무엇을 그리기 이전에 자기 치유적 작업, 자기 방어적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작업을 하는 동안 철학이나 과학 강의를 틀어놓고 들으면서 작업을 한다고 하였다. 이는 머리가 복잡한 이야기를 쫓느라 바쁜 동안, 손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무심한 끄적임(Mindless Scribbling)”이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계산된 그림이 아니라 순간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기록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작가는 이 부분을 “무심한 끄적임이고, 그저 순간의 에너지이며, 그렇기에 채워놓은 것 같지만 비어있음이 가득찬 역설과 공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역설도 공허도 그 자체가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어떤 대상은 아니라는 주지할 필요가 있다. 역설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상황을 드러내서 알지 못했던 진리나 의미를 발견하도록 만드는 사유의 장치이다. 공허 역시 일차적으로는 텅 비워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비움이라는 현상은 채움이라는 현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의 작업에서 역설로부터, 공허로부터 과연 무엇을 그려내고자 한 것일까? 그의 작업 노트를 살펴보면 작가는 이 모호한 지점을 틈새, 균열이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작가는 균열을 완벽한 질서에서의 오류이고, 예상치 못한 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이를 `캔버스 안에 머무르지 않고 액자 옆면까지 기어 나오는 것에 함축해내고자 한다고 했다. 작가는 이 틈을 통해 창조와 파괴의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오히려 작가가 작업 가운데 사유하게 되었던 질문들만을 지속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는 역설과 공허의 대칭점에 과연 무엇이 놓여 있는가에 대해 조명할 뿐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화지와 캔버스 위에 수많은 행위의 흔적들을 쌓아 놓으면서 동시에 이를 비움의 궤적으로 이름 붙이고자 하였던 점을 다시 주시할 필요가 있다. 작업 가운데 수많은 행위의 흔적들을 중첩시켜 쌓아놓았기에 당연히 눈에 보이는 축적물들이 보일 수 밖에 없음에도 이에 대해 결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려 하는 작가의 의지는 과거 빈 종이 앞에 무서웠지만 이후 모든 것들이 허물어져 있는 것과 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던 독특한 경험이 변형되고 연장되어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작업 과정에서 쌓고 구축하는 행위의 흔적들이 삭제하고 소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백색의 화지 앞에서의 공포를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끝없는 흔적들을 남겨놓는 수행과도 같은 작업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드로잉은 텅 빈 백색 화지 공간과 신체 안에 가둬져 있는 내면 세계를 연결하는 신비로운 언어이다. 드로잉 작업은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두 세계 사이에서 에너지의 흔적들을 교환하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는 일이자 동시에 무엇인가를 모두 소거하는 도구가 되어 그 행위의 흔적과 그것의 실체에 대해 인식하도록 만드는 역설의 언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무심코 그려나가는 낙서와 같은 작업은 단순히 비워져 있던 백색의 화지를 채워나가는 작업만이 아니라 숨겨져 은폐되어 있었던 내면 세계를 또 다른 드로잉일 수 있는 비워가는 행위들의 궤적에 대한 기록이었음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또한 이와 같은 낙서적 처방은 완벽해야만 했고 가득 채워져 있어야만 했던 내면 세계에 균열을 가하는 행위가 되어 정해진 알고리즘의 틀에서 벗어나 현실을 각성케 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는 점도 함께 보여준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이 낙서와 같은 무의식적 행위의 연속 가운데 이뤄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서도 특별히 주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우연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어떻게 자아의 필연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리학자들은 이 세계가 불확정적이고 우연적으로 보이는 미시세계를 토대로 하여 거시세계의 질서의 세계, 필연적이고 확정적인 세계가 접붙임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철학자 헤겔(G. W. F. Hegel)은 "우연적인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필연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필연적인 것은 우연성을 통해 자기를 외화(外化)하며, 이 우연성 속에서 비로소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필연은 본질의 질서이고 우연은 존재가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외면적 현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 ‘있음’이란 우연과 필연의 긴장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며 인간의 자아는 그러한 우연적 경험과 선택 속에서 형성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진석 작가는 드로잉이라는 우연과 필연이 교차되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낙서적 채움을 그리고 수행적 비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그려낸 것들이 아무것도 그려내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자아의 무한한 원천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작업에서의 반복된 행위와 반복된 패턴은 자아를 획득하는 방법이자 자아를 비워내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드로잉의 신체적 행위가 갖는 양가적 의미들을 반어적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비움의 궤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승훈 (미술비평)
작가약력
김 진 석Jin Suk Kim
학력
개인전
단체전
작품
엔트로피 2 — 한지위에 안료잉크, 73x146cm, 2026
우린 모두 사라지고 자유의지는 없다 — 종이 위에 아크릴과 안료잉크, 73x146cm,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