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문을 나서면 나무와 풀과 꽃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다. 키 작고 연약한 개체들에 먼저 시선이 간다. 그들을 천천히 깊게 바라보면 특별한 미적 경험을 하게 된다. 관목 가지들은 바람에 휘어져 서로 엉켜 기대고 있고, 덤불과 풀들은 빛을 찾아 특유의 방향성을 가지며, 생을 다한 건초들은 어린 풀꽃들의 바람막이와 그늘이 되어 주고 있다. 제 몸이 속한 시공간의 조건을 고스란히 형태에 담고 있는 식물들의 조형미에 자주 감탄한다. 자연의 개체들이 대지 어느 곳에 뿌리를 내려 치열하게 삶을 이뤄내는 생명의 시간 을 포착하는 데서 나의 이미지는 시작된다.
푸르게 번성했던 개체들은 곧 소멸의 시간으로 들어서지만 머지않아 재생으로 돌아온다. 어느 시간의 형태이든, 변화를 이루 며 온 과거가 현재 속에서 가려질 뿐이며 미래 또한 내밀하게 품고 있는 시간의 동시성을 눈치챌 수 있다. 작품들의 전체 제목인 <Time of the Earth(대지의 시간)>
지속의 층위, 대지 위에 새긴 생명 충동의 흔적 혹은 변환된 감각에 대하여
변수옥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나무, 풀, 꽃이 자라나고 있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화폭에 담아낸 여러 작업들을 선보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과 관련하여 “자연의 개체들이 대지 어느 곳에 뿌리를 내려 치열하게 삶을 이뤄내는 생명의 시간을 포착하는 데서 나의 이미지가 시작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작업에 앞서 언젠가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작가는 어느 순간 그곳에서 생명을, 그리고 시간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치열하게 자라나고 있는 개체로서의 생명이 포착되기도 했지만 푸르게 번성했다가 소멸해가고 다시 재생되어 돌아오는 과정을 바라보게 되면서 생명이란 결국 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 순환하고 있는 자연에 대해 그리고 그 자연의 섭리에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동시성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부터 자연의 역동적 변화를 ‘지속의 순간’이라는 개념 가운데 작업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그의 저서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지속의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베르그송은 지속이란 “단순히 연속된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서로 스며들며 흐르는 내적 경험”이라고 하였다. 이는 물리적으로 인식되는 양적 시간과 달리 의식과 생명 속에서 경험되는 질적 시간을 강조한 것이었다. 변수옥 작가 역시 자연의 생명력이 발현되는 변화와 순환의 현장을 바라보는 가운데 시간의 흐름 속 지속의 어느 한 순간, 다시 말해 의식과 생명 속 질적 시간에 대해 직관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직관한 순간은 현재 속에 작동하는 과거의 지속이자 미래를 내포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며 동시에 생명이 발현하고 소멸하는 순환적 시간성을 경험하는 찰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은 또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엘랑 비탈(élan vital)’이라고 지칭한 지점, 다시 말해 생명 충동의 개념과도 연결시켜 읽어볼 수 있는 지점이 되고 있다. 생명 충동이 끊임없이 창조하고 진화하는 내적 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보면 작가가 자연 속 시간의 흐름 가운데 변화와 순환을 경험하게 되었던 순간은 생명 충동의 발현이 된 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변수옥 작가가 회화와 판화가 결합된 기법을 사용하여 작업하게 된 것도 이러한 작가의 관점이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는 판화적 프로세스와 여기에 선형적 시간성이 내포된 회화적 프로세스가 중첩된 작업 방식은 지속의 순간 속에서 변화와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들이 어떻게 현재적 경험 및 총체적 생명력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단순히 자연을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생명 충동의 지속과 창조적 진화의 현재적 발현을 어떻게 조형 언어로 번안해 내는가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 왔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작가가 전시 주제를 ‘대지의 시간 2026’으로 지칭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즉 작가는 생명이 발현하는 대자연의 컨텍스트(Context)로서 그 공간적 지평을 상정하여 이를 ‘대지’라는 개념으로 대리하고 연속적으로 이를 시간성 속에 호출해 냄으로써 2026년이라는 현재성의 한 지점에서 이 모두를 교차시켜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 순간을 어떤 화려한 묘사나 과장된 형태로 비약하기보다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감각의 한 지점으로 치환하여 어떻게 보면 미물처럼 보일 수 있는 작은 나무와 풀, 그리고 꽃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작가는 생명의 발현이란 거대한 무엇이라기보다는 작은 차이를 감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변화와 지속이 교차되는 순간에 대해 각성이 곧 세계와 우주가 순환하는 자연의 본질과 맞닿는 지점임을 통찰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통찰의 순간을 관객들도 접할 수 있도록 이번 전시에서 그 미세한 감각의 순간을 회화 작업을 통해 대지의 시간이라는 장으로 변환하여 펼쳐 보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자연 속 생명의 한 순간 속에 담긴 지속의 시간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승훈(미술비평)
작가약력
변 수 옥 Byun Sue Ok
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사졸업 M.F.A.
개인전
2026 갤러리 너트, 서울
2024 가온갤러리, 서울
2016 재동갤러리 초대전, 서울
2016 현대미술관(홍익대학교), 서울
2016 주인공갤러리 기획초대전, 서울
2013 경인미술관, 서울
2010 다미갤러리 초대전, 대구
2009 환갤러리, 서울
2009 춘천문화예술회관, 춘천
2008 국제현대미술제, 북경갤러리T&G, 북경, 중국
2005 영등포평생학습관 갤러리 초대전, 서울
단체전
2026 판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초대전, 아트스페이스 네오, 안산
2026-07 필로프린트판화가협회전, 갤러리 은, 서울 외
2023 정통판화전, 에코락갤러리, 고양
2022 메타 프린트 2022,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HoMA, 서울
2022 한국태국 현대판화교류전, 한국문화원, 방콕, 태국
2022 조형아트서울, Coex, 서울
2021 인천아시아아트쇼, 송도 컨벤시아, 인천
2021~16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미술관, 서울 외
2020 파주미협전, 파주시립미술관, 파주시
2019 한일판화교류전, 갤러리 인사아트, 서울
2019 WGAF 세계아티스트교류전, 고색뉴지엄, 수원
2019 아트락 페스티벌, 스타필드 고양, 고양
2019 Freedom 2019 <어제와 다른 내일>, 양평군립미술관, 양평
2019 한일현대판화교류전, 갤러리H.O.T, 오사카, 일본
2016-11 빛을여는사람들전(결핵환우돕기 나눔전), 평화화랑, 서울
2016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미술관, 서울
2014-13 Blowing Flags in San Bernardino, San Bernardino, USA
2013 The Exhibition of Korean Contemporary Prints in Spain 2013, 마드리드 한국문화원 초대전, 스페인
2013 The Exhibition of Korean Contemporary Prints in Spain 2013, 귀국전, 혜화아트센터, 서울
2011 대구아트페어, EXCO, 대구
2009 분홍&핑크전, 정독갤러리, 서울
2008 현대판화전, 루쉰미술관 초대전, 중국 심양
2006 새날전, 주노아트, 대구
2004 태백석탄풍경전, 태백석탄박물관, 태백
2004 오래된미래전, 철암역갤러리, 철암
2003-14 이면전, 서울 외
2003 한중 판화교류전, 중경미술관, 중국 중경
2002-3 서울국제판화페스티벌, 예술의 전당, 서울
2001-2 한국현대판화전, 바탕골미술관, 서울
2000 현대판화20인전, 관훈갤러리, 서울 (외 단체전 100여 회)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대지의 시간 1504>, 한국가톨릭결핵협회 외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공간판화비엔날레,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공모전 특선
한국현대판화가협회 회원, 필로프린트판화가협회 회원
E-mail: suebyu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