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 위에 먹 분채 펄, 60x50cm, 2026

장지 위에 먹 분채 펄, 130x91cm, 2026
모호하고 흐릿한 이미지 혹은 역전된 위치로부터 읽게 되는 감각적 세계에 대하여
이은정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스며들다’라고 하였다. 한지 위에 표현된 흐릿한 이미지들은 그려낸 것인지 그야말로 스며들어 있 었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가가 그려낸 회화는 명료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안개처럼 희미한 레이어 너머로 몽환적임에도 오히 려 어떤 의미에서는 더 명료하게 다가오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한 세계에 대해 자신만의 감각적인 표현방식으로 전해주고 있음을 보 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희미하지만 무엇인가를 각인시키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들은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으나 이는 어쩌면 작 가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스며듦의 미학이 주는 효과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 인다. 왜냐하면 경계가 흐려져 있는 이미지들은 그 대상의 본질보다는 분위기와 감각이 강조되면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보다는 ‘어떤 느낌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각성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상을 기존의 회화의 경우 시각적 초점이 강조하도록 만드는 효과나 영역 안에 가둬 두었던 방식에서 작가는 이를 벗어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포 지티브 공간이 구축해왔던 선명함 혹은 명확함에 대한 관념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지점은 이은정 작가의 회화 를 특히 주목하도록 만드는 부분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기존의 한국화에서 여백과 비움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영역, 즉 전면의 대상의 배후인 네거티브 영역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곳에서 느끼게 되는 것들에 대한 관점을 역전시켜 포지티브 영역에 위치시키고 이 위치에서 새롭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작업에서 배경이라고 여겨져 왔던 이미지의 외곽 부분에 대하여서는 빽빽하게 짧은 선묘 작업으로 채워놓은 대신에 중앙의 대상적 이미지 부분은 거의 백지와 같은 느낌이 들도록 비워놓은 듯이 여기에는 극도로 희미하게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부분에 특히 잘 드러나 있음을 보게 있다. 작가는 지금까지 ‘여백의 미’라고 지칭되어 왔던 것들 혹은 네거티브 영역에서 느껴져 왔던 것들을 화면의 중심으로 가져와 이를 자신의 회화로 풀어내고자 한 것이며 이로부터 자신만의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가 작업해온 일련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작가는 아마도 명료하지 않은 것,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 그래서 마치 비워져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들에 주목해 오게 되면서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가운데 작업을 진행해 왔던 것으로 보이며, 작가는 결국 이러한 것들에 대해 ‘스며들다’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고, 자신의 작업에서는 마치 화지 속에 스며든 것 같은 이미지들 을 통해 이제까지 자신이 보이는 것 이면에서 감각하게 되었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되었던 것들에 대해 표현하게 되었던 것으 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이와 같은 느낌, 그 미묘한 감각들을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화면의 중심보다는 배경이라고도 하고 여백 이라고도 지칭해왔던 곳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 스며 있는 감각들을 화면 주변의 보조적인 감각으로만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면화하여 이로부터 작가는 자신만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작가노트를 보면 작가는 규 정되지 않는 것, 모호한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작가는 이것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고 자리잡 고 있는 것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모티브로 삼고 있는 ‘못난이 인형’, ‘만들어진 백합’, ‘어머니’ 의 이미지들이란 작가에게는 어딘가 스며들어 있어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고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 흐릿함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 즉 부드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따듯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다양한 감각의 이미지들로 다가온 것들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실 흐릿함이라는 것, 모호함이라는 것은 명료함, 분명함이라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함유하는 그릇일 수 있다. 정보이론에서는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정보량이 적다는 것이며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를 근거로 하여 보면 작가가 감각이 라고 말하고 있는 영역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감각하는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풍부한 것들을 제한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 으로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선명한 이미지 안에 가두기 보다는 흐릿한 이미지의 불확실성 가운데 놓 아둠으로써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우연히 일어날 수 있고, 파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감각적 교감 을 유발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작품을 매개로 하여 감각의 언어를 통한 대화기를 시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흐릿함을 통해, 비워 놓음을 통해 생겨나게 된 미완의 여백 혹은 공백의 공간을 마련해 놓고 관객들이 상상을 통해 채워 넣거나, 그려 넣을 수 있도록 상상 의 작업 공간을 자신의 회화 안에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인간의 인지적 행위, 즉 감각하고 기억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돌이켜 보면 선명하게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흐릿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희미하면서도 간혹 분명해지는 상황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 그 자체뿐만 아니라 정서나 감성에는 변화가 있기 마련이기에 이에 따라 같은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인식이나 기억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선명 함과 흐릿함, 기억과 망각은 뚜렷히 구분되기 보다는 일정한 연결지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감각 의 어떤 한 지점을 부각시켜 작업에 가져오기 보다는 비워져 있는 것 같으나 채워져 있고 흐릿해 보이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 모호 한 감각 자체의 문제를 작업으로 가져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작가는 시선의 방향을 바꿔 네거티브 공간과 포지티브 공 간의 역할을 뒤집어 타자의 시선과 감각, 그리고 상상력으로부터 작가가 ‘스며있다’라고 대리적으로 표현한 그 여백의 공간, 그 감각 공간을 함께 채워나가기 위해 자신의 작업을 감상하는 관객들과 대화하는 과정이 작업이 완성되는 과정이 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 인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지각은 모호함의 경험”라고 하였고 “지 각된 세계는 내가 보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볼 수도 있는 것, 즉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될 것까지도 포함한다”라고 하였다. 작가는 이처럼 인간의 인지 작용의 한계적 위치를 뒤집어 관계적 시각 속에서, 그리고 여백이라는 위치를 역전시킴으로써 시각적 관념 너머 의 감각의 세계로부터 작가 스스로 다르게 보기, 다르게 느끼기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들 도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감각방식으로 참여하여 각자 자신만의 시각으로 작업에 대해 상상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이곳에서 자신들만 의 개별적 경험을 해 보도록 함으로써 작업에 대한 여러 해석과 상상 그 자체가 작업이 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해 체주의 철학자들은 이미지적 상징을 포함하여 언어적 기표가 기의에 그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고,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호함 속에 지시하는 의미의 미끄러짐을 말하면서 결국 의미작용이라는 것은 관계 와 맥락 속에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은정 작가는 대상과 배경을 역전시켜 새롭게 형성된 관 계 속에서 자신의 회화를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이 구축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가운데 지각하고 감각하게 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해 작업을 통해 질문하고 이로부터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이고 무엇을 감각하 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승훈 (미술비평)
이 은 정 Lee Eunjeong
작가약력
개인전
2025 모호한 상징(Fluid Symbol) (세종 그린갤러리)
2025 그린갤러리 작가지원전-오래된, 번지고 흐려진 이미지 (대전 그린갤러리)
2024 ‘흐릿한 그림 그리고 여인’ (서울, 갤러리 자인제노)
2024 ‘여성가계도’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단체전
2025 너머의 언어-대전예술포럼 (대전, 대전갤러리)
2025 흐릿하고 고요하게 (청주 예일갤러리)
2025 22회 이동훈 미술상 특별상 수상작가전 (대전, 대전시립미술관)
2025 유목한다는 것(好)-한불조형예술협회 정기전 (서울, 화인페이퍼갤러리)
2025 그녀들은 ing-갤러리메르헨 기획 (대전, 갤러리 메르헨)
2024 Nakhon Sawan International Art Festival 2024
77artlej@gmail.com
작품
씌워진 여인 — 장지 위에 먹 분채 펄, 60x50cm, 2026
씌워진 여인 — 장지 위에 먹 분채 펄, 130x91cm, 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