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감각, 미끄러운.
Sense of the blind. Lubricous
더플럭스 개관기념전
2019.11.22 ▷ 12.15

눈먼자의 숲에서 메두사를 보라 Behold Medusa at the forest of the blind 181x227cm oil on canvas 2019-4

The pond of Veiled Ophelia 162x130cm oil on canvas 2018-9

The pond of Veiled Ophelia 162x130cm oil on canvas 2018-A6
붓질그림, 눈먼감각, 미끄러짐에 관한 인터뷰-2019.11
미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표인 질료성의 극대화를 위한 붓질의 속도, 이 속도에 의해 탄생하는 자율적 세계를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것이 제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양가적인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더욱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양가적 질서의 회복은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또는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타도해야 할 거대담론과 미시권력들과 같이 이분법적인 것을 떠나서 본인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들이나 혹은 우리의 가치관의 붕괴, 그 어느 곳에서나 화두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미술에 직접적으로 투영된다는 것이며, 그 삶 속에 본인의 경험과 언어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궤적을 붓이라는 물체를 통해 화면에 표출하려는 것이 제 작업의 요체입니다.
너무나 많은 기표가 담긴 것, 상상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이거나 환유적으로 생략되는 감각을 어떻게 미술로 표출할 수 있었을까요? 미술이 더이상 소설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미술이 라오콘의 비명이나 메두사의 웃음 그 이외의 다른 해석에 반대되는 많은 논의를 뒤로하더라도, 결국 감각을 작용시키는 그 무엇인가가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 그림에서 등장하는 폭포들은 그저 흰 색깔들의 자극적인 움직임들이며, 제 그림에 등장하는 오필리아의 연못은 오필리아가 죽음에서 자율성을 획득하고 사회화되면서 하나의 개인성을 갖게 되는 그런 존재 이전에 푸른 물감들로 덮인 화면의 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푸른 물감으로 덮인 이러한 영역을, 가능성이 많은 잠재태로서의 연못으로 보이기를 원하여 붓질의 마찰을 0도로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먼저 캔버스의 밑 색깔을 칠한 다음 어느 정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기름칠을 계속합니다. 이 과정은 잘 미끄러지지 않는 빙판길 위에 살짝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몸이 빙판 위에서 중심을 유지하려는 의지, 자율적으로 미끄러지는 우발성과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이 모든 것을 함축시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캔버스 위의 걸쭉한 질료들을 붓과 접촉시켜 생겨난 압력에 의해 예상한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작업을 이어갑니다. 붓의 넓이가 넓으면 넓어질수록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되며, 게슈탈트를 의도하려고 하는 작가의 의도성을 배신하게 됩니다.
붓질은 때로 자율적으로 미끄러지기도 하고, 붓질 속에 머금고 있던 질료들은 붓질을 통해 붓의 가장자리 밖으로 밀려 나오기도 하며 튕겨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어떤 대립 관계와 유사합니다. 이렇게 뛰쳐나온 것들은 마치 이성에 의해 지배받는 유기체적인 머리에 관한, 신체의 부활과도 같은 것입니다. 혹은 감추어져서 표출될 수 없었던 야만성 동물성 또는 배덕감과 같은 감정이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이런 감각의 덩어리들이 가득 차 있는 숲은 하나하나 정의되고 정리된 나무, 동물, 숲, 집 그리고 폭포들로 채워집니다. 이렇게 채워진 대상들은 바깥 선에 유격을 두고 벌어지게 되면서 많은 가능성을 내재합니다. 이는 니트로넬로들의 집합과 유사하며, 다시 리좀의 줄기들같이 선명하게 정리가 되어 캔버스 위에 표현됩니다. 리좀은 수목적이거나 정리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줄기 식물인데, 제 그림에서는 이것의 의미가 전환되고 박탈되며 반대 기표로서 정리된 리좀들이 가능성을 가진 사물, 즉 가능성을 가진 나무와 가능성을 가진 바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외형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탈주하게끔 하고 끊임없이 부정하게끔 하는 것이 제 작품의 요지입니다.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들
Ⅰ.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주최하는 2018년도 <작가상>은 권여현에게 돌아갔다. 이 상은 제1회 수상자로 조각가 정현을 배출한 이래 한국화가 석철주, 사진작가 민병헌 등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중견 내지는 중진작가들을 선정, 매년 수상해 왔다. 동 협회는 이 상의 제정 취지에 대해 “자기 세계를 굳건히 지키면서 새로운 경지를 모색하는 작가에게 이 상을 수여”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권여현에게 이 상이 돌아간 것은 지난 30여 년간 그가 보여준 왕성한 실험정신과 매체에 대한 개방적 의식, 그리고 철학을 비롯한 현대의 다양한 정신문화를 흡수, 소화하여 자기화하려는 꾸준한 욕망을 높이 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로 권여현은 하나의 스타일(樣式)을 개발하면 평생토록 우려먹는 안주형(安主型)의 작가들과는 달리 다양한 변신을 거듭해 왔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그런 그를 가리켜 ‘변신의 천재’라는 수사(修辭)로 그를 묘사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권여현은 회화를 중심으로 오브제, 설치, 사진,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그리고 최근에는 실험영화에 이르기까지 가히 전방위적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왕성한 활동의 배경에는 과연 어떤 요인이 잠재돼 있는가? 화단 데뷔 초기부터 그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고, 또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글을 수차례에 걸쳐 쓴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좀 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정열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처 모르는 게 많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작가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작업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도 완전히 다 알지 못할 만큼 불가해한 측면이 있으며, 더구나 우연적인 요소마저 감안한다면 특히 동시대미술에 나타나고 있는 저 다양한 개념적인 양태들은 작가를 일종의 신비스런 베일 속에 안치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권여현의 작품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가 화면에 깔고 있는 허다한 지식의 원천 때문이다. 관객들이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무수한 도상들의 출처(원전)를 알아야 하며, 나아가서는 그것들이 그에 의해 현재화되는 미술사적 내지는 문화사적 맥락은 물론 왜 그것들이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작가의 심리적 동인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그 이면의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90년대 초반에 내가 그를 가리켜 ‘내밀한 독백형의 작가’라고 요해한 것처럼,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고 가는 명주실을 뱉어내듯이 의식의 화학적 변화의 결과물인 그의 진술에 대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권여현의 그림을 관류하는 도식은 ‘Y’라고 하는 시간축과 ‘X’라고 하는 공간축의 교차점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바둑판처럼 두 축이 교차할 때 생기는 무수한 정방형들로 이루어진 판상에 정교한 의식의 풍경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작가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의 추이를 일종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이러한 시도는 미궁처럼 복잡해 보이는 기호와 상징, 그리고 영상들로 가득 찬 작품들을 낳았다. 그 요체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90년대 초반에 쓴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곧 ‘거울’과 ‘벌레’로 대변되는 두 개의 메타포이다. 전자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작가 본연의 모습이고, 후자는 변신의 천재로서의 권여현의 면모이다. 이 두 가지의 메타포가 구체적으로 표상된 것이 다름 아닌 등장인물로서의 전경(前景)이라고 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X-Y의 두 축은 일종의 에피소드요 삽화로 후경층(後景層)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요소를 통해 그의 그림의 내용이 실은 이 두 개의 메타포와 요소들의 복잡한 변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의식의 투영과 인식 지평의 확장-권여현 론(論), 1994>-
그로부터 다시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변했는가? 이제 권여현의 작품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복잡다기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단절이 아닌 연속의 양상을 띠고 진화해 온 그 세계의 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화의 내면화이다. 이미 그는 90년대 초반에 산적(Kebab>, 깔대기, 물맷돌(water millstone)과 같은 일상용품의 등장을 통해 동서양의 명화들을 한 자리에 공존시키는 회화적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F. 니체와 춘원, 말러의 초상화와 혜원의 도상을 화면에 등장시키는 가운데 선형적(linear)이 아닌 리좀적(rhizomatic) 시간관을 도입시킨 것이다.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닌 맥거핀(Macguffin)의 세계는 이의 보다 정교하며 확장된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맥거핀 욕망이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인 권여현이 스스로의 내면세계에 빠져들면서 다양한 독서와 동서양 명화의 감상 체험에서 얻은 다채로운 개념의 그물망을 직조해 내고 그 안에 자신을 유폐시킨 미궁의 풍경이다. 이 개념은 역시 그가 고안해 낸 다른 두 개념들, 즉 ‘통합혼성체(Syntagm : syntagm+hybrid)’와 ‘뿌리줄기의 숲(Rhizome forest)’과 함께 그가 그려내고 있는 미궁을 탐사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탐사지도와도 같다.
2007년에 발아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진화해 간 권여현의 숲 그림은 동서양 명화 이미지의 집합소이자 다양한 상징과 기호들의 저장고이다. 그의 숲그림은 한 번에 쓱 훓어보는 일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미세한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서 비밀을 풀어야 하는 ‘읽기’로서의 이해의 대상에 가깝다. 맥거핀은 이 과정에서 작가가 그림의 도처에 심어놓은 지뢰와도 같다. 무수한 동서양 명화의 이미지들을 차용하거나 번안 혹은 패러디한 그의 그림에서 가장 큰 난점은 관객이 그러한 이미지들의 원작과 나아가서는 출처와 관련된 배경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앞에서 철학과 미술사내지는 문화사를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앞의 전제들을 관객이 무사히 통과했다 하더라도 작가가 깔아놓은 함정, 즉 맥거핀의 지뢰를 밟는 경우이다. 작가가 관객의 시선을 끌기위해 의도적으로 고정시켜 놓은 장치에 관객의 시선이 포획될 경우 작품의 올바른 이해는 빗나가기 일쑤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Rhzome forest>, <박쥐-리좀>, <루 살로메의 숲>, <창세기의 숲>, <헬로 들레즈씨>, <프쉬케의 숲>, <아르테미스의 숲>, <<아폴론과 다프네의 숲>, <잔 다르크의 숲> 등등의 명제에서 보듯이, 그가 2008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그린 수많은 숲그림들을 관류하는 특징은 칡넝쿨들이 사방에 엉킨 원시림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 개념의 상징물로 보이는 이 칡넝쿨은 일종의 그물망(net)의 메타포로 기능하며, 대상의 포획을 암시한다. 앞에서 최태만이 언급한 것처럼 철저히 손에 의존하는 그의 그림은 2009년에 발표한 그의 퍼포먼스 <구도자>에서처럼 오체투지에서 오는 고행의 연장으로써 신체성이 강조되는 고행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무수한 그물망으로 뒤엉킨 그림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수행하듯 미궁 속에 숨겨진 암호를 풀어가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의 독해에는 난해한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 각주가 붙듯 무수한 참고물들이 필요하다.
권여현의 그림에는 문명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싱싱한 원시림이 펼쳐진다. 짙은 녹색과 파란 하늘, 비옥한 황토색의 땅으로 대변되는 이 이상향은 작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비원(秘苑)이다. 그 곳에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 속에 나오는 도상을 일부 차용한 장면이 나타나기도 하며(<다이아나와 프리다 사슴>, 234x91cm, 캔버스에 유채, 2008), 숲은 루소의 소박한 풍으로 그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여현은 근대 이전의 싱싱한 자연의 상태로의 회복을 동경한다.
권여현의 2013년 작품인 <리좀 나무-폭포>(227x187cm, 캔버스에 유채)는 원시림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묘사한 대작이다. 이 그림에는 이미 1990년대에 시도한 동서융합의 정신이 더욱 치열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양화의 근간인 기운생동에 의한 필력과 중국의 사혁(射赫)이 말한 골법용필, 그 중에서도 몰골법에 의한 사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마치 아마존의 숲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장쾌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를 배경으로 수많은 벌거벗은 남녀들과 동물들이 나무 위에 서거나 거꾸로 매달려 있다. 한 두 사람은 이제 막 높은 나무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권여현의 숲그림을 관류하는 특징은 특유의 야생성이다. 거기에 벌거벗은 인간군상이나 명화 속의 이미지들이 마치 거미줄과도 같은 넝쿨들에 포획돼 있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것들은 베일에 가려진 것이나 진배없다. 그것들은 아직 해독(解讀)이 채 안 된 미답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문명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권여현은 자신의 숲그림을 통해 대중이 무뎌진 감각의 회복을 시도하기 바란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명화되기 이전의 동물로서의 인간, 즉 야생적으로 사고하고 숨쉬는 원초성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다.
윤진섭(미술평론가)
권 여 현 /權 汝 鉉 /Kwon, Yeo-Hyun
1987.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1985.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작가약력
수상
2018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2005 제5회 하종현미술상
1995 제1회 한국일보 청년작가전 우수상 수상(백상 갤러리)
1991 제 10회 석남미술상 수상
1990 제 13회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수상 (호암갤러리)
1986 ’86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1984 제 9회 창작미협 공모전 대상 수상 (미술회관)
개인전 (40회)
2019 눈먼 자의 숲에서 메두사를 보라. 보혜미안갤러리. 서울
2018 ‘Veiled Ophelia in Ulysses Forest’ 통인갤러리. 서울
2015 The pond of Ophelia 금산갤러리, 서울
2014 ‘Ophelia in Forest’ Faculty gallery UCSC. CA. USA
2013 ‘맥거핀 디자이어’ OCI 미술관. 서울
2011 ‘코나투스의 체계 ’ ITB 갤러리, 반둥, 인도네시아
2010 ‘마법풀기 ’ 더 컬럼스갤러리, 서울
2007 ‘Syntagm-Roleplaying’ 씨떼 데자르. 파리, 프랑스
2004 ‘동서고금을 가로 지르다’ 사비나미술관,서울
1994. ‘What Constitute I’ 예술의 전당. 서울
1988. ‘실존공간’ 토갤러리. 서울
퍼포먼스 (6회)
2009 불의모험 “구도자” (제5회 국제도자비엔날레 국제 퍼포먼스)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 후쿠오카 문화재단. 선재 현대미술관 등
그룹전(390여회)
2018 경계의 통로 .산티아고 호텔 레지던스 , 필리핀.
2017 청년의 초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
2017 월곡 – 달빛정원을 걷다. 권진규미술관. 춘천
2016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국립미술관 과천30년 특별전. 국립미술관 과천
2016 아름다운 순간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14 ASIA국제미술전람회 Rajchadamnern Contemporary Art Center, Bangkok, Thailand
2012 한국-대만교류전, 한국현대미술전. National Taiwan museum of fine art. Taichung. Taiwan
121-791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9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02 320-1206, www.arthyun.com artkw@hongik.ac.kr
작품
눈먼자의 숲에서 메두사를 보라 Behold Medusa at the forest of the blind 181x227cm oil on canvas 2019-4 — The pond of Veiled Ophelia 162x130cm oil on canvas 2018-9
The pond of Veiled Ophelia 162x130cm oil on canvas 2018-9 — The pond of Veiled Ophelia 162x130cm oil on canvas 2018-A6
The pond of Veiled Ophelia 162x130cm oil on canvas 2018-A6 — 붓질그림, 눈먼감각, 미끄러짐에 관한 인터뷰-2019.11
